남북한 업무 20년의 대표적 한반도 전문가
한국 '가치외교'와 중국 '전랑외교'의 충돌
기대 못미친 4년6개월 활동 마치고 내달 교체
중국, 한·중 관계 관리 의도...정책 변화는 없을듯
[서울=뉴스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 대사가 이달 중 한국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간다. 부임 당시 중국 내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로 많은 기대를 모았던 싱 대사는 4년 6개월 간의 한국 근무를 통해 '수교 이래 최악의 한·중 관계'라는 성적표를 남기고 결국 쓸쓸하게 퇴장하게 됐다.
싱 대사는 지난 4일 이임 인사 차 조태열 외교부 장관을 예방하고 돌아가는 길에 기자들과 만나 "한국 정부나 각계각층에서 많이 도와줘서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의 한·중 관계를 의식한 탓인지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는 못했다.
[서울=뉴스핌] 김학선 기자 = 이임을 앞둔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본국 귀환에 앞서 조태열 외교부 장관을 만나기 위해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를 방문하고 있다. 2024.07.05 yooksa@newspim.com |
싱 대사는 한·중 수교 당시 주한 중국대사관의 3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는 등 한·중 관계의 중요한 일에 깊이 개입했던 한국 전문가다. 그는 20여 년 동안 남북한 관련 업무에 종사하며 한국 내 많은 인맥을 쌓았고 한국에 대한 애정도 깊다. 역대 주한 중국 대사 중 가장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자랑하는 '한국통'이다. 싱 대사가 이임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양국 관계를 잘 발전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진심일 것이다.
지한파 중국 외교관으로 많은 기대를 받으며 부임했던 싱 대사의 재임 기간에 한·중 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가 한국에 근무하는 시기에 중국이 이른바 '전랑(戰狼) 외교'로 불리는 시진핑(習近平) 시대 특유의 공격적인 외교 기조를 보인데다, 2022년 출범한 윤석열 정부가 '가치외교'를 표방하며 한·미 동맹 강화를 최우선으로 삼는 대외정책으로 중국과 충돌하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싱 대사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윤석열 정부의 외교 정책을 강하게 비난하는 발언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한 외교 소식통은 싱 대사를 두고 '시기를 잘못 만난 대사'라고 평가했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많은 싱 대사가 우호적 한·중 관계가 가능한 시기에 대사로 일했더라면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표현이다.
최초의 충돌은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부상하던 2021년 7월이었다. 싱 대사는 당시 윤 '전 검찰총장'의 중국 관련 언급에 대해 국내 일간지에 직접 '윤석열 인터뷰에 대한 반론'을 기고했다. 싱 대사는 기고문에서 "중·한 관계는 결코 한·미 관계의 부속품이 아니며 양국 관계의 발전은 다른 요소로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싱 대사가 윤석열 정부와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된 것은 유명한 '베팅 발언'이었다. 그는 지난해 6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주재하는 외국 대사가 관저로 야당 대표를 초청해 직접 준비한 원고를 읽으며 정부의 대중국 외교 방향을 강하게 비판하는 이례적인 모습에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외교부는 싱 대사를 초치해 항의했고 여당 내에서는 싱 대사를 '페르소나 논 그라타(외교적 기피인물)'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 사건 이후 싱 대사는 사실상 한국에서 대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정부 인사들은 싱 대사와 접촉을 피했고 그의 대외 활동은 위축됐다. 싱 대사가 조태열 외교 장관을 공식적으로 처음 만난 것이 이날 이임 인사 자리였을 정도다. 싱 대사는 지난 1년간 이임설이 끊임없이 나돌던 사실상 '식물 대사'였던 셈이다.
[서울=뉴스핌] 국회사진취재단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6월 8일 오후 서울 성북구 중국대사관저를 방문해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와 만찬 회동을 하고 있다. 싱 대사는 이날 이른바 '베팅 발언'으로 윤석열 정부와 결정적으로 멀어졌다. 2024.07.05 photo@newspim.com |
싱 대사의 이임 소식이 전해진 뒤 국내 관심은 즉각적으로 한·중 관계 변화 여부에 쏠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윤석열 정부의 눈 밖에 난 싱 대사를 교체하기로 결정한 것이 한·중 관계에 변화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중국 내에서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사나운 외교'로 각인된 중국의 이미지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중국이 '전랑 외교'를 지양하고 보다 대외 관계에 적극성을 보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싱 대사 교체가 한국에 대한 중국의 외교적 정책 변화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의 한반도 정책이 변화하고 있다는 조짐은 아직 없다. 중국은 여전히 한국과 접촉할 때마다 '한반도 정책 불변'을 강조하고 있고 '핵심이익 존중'과 '외세 간섭 배제'를 건전한 한중관계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이 대만 문제에 간섭하지 말아야 하고 미국을 일방적으로 추종하는 외교에서 벗어나 독자적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중국의 일관된 주장이다.
중국이 최근 한·중·일 정상회담에 이어 한국과 외교 전략 대화를 갖는 등 고위급 소통을 늘려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전술적 변화'에 가깝다. 중국은 북한과 러시아가 과도하게 군사적으로 밀착하고 있는 것에 경계심을 갖고 있으며, 11월 미국 대선 결과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중국은 여러 개의 공을 번갈아 공중에 띄워 '저글링'을 하듯 특유의 현상 유지 정책에 치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중 관계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중국은 미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통한 이른바 '대국 외교'로 한국과 북한 등 주변국과의 외교를 풀어나가려는 관성이 있다"면서 "한·중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지만 중요한 현안에 대해서는 강경한 자세를 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opento@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