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보건복지위원장·서울 은평갑 3선 의원
인권변호사서 국회 입성 후 사회적참사법·중대재해처벌법 등 통과
[서울=뉴스핌] 지혜진 기자 =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이자 3선의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은평갑)은 국회의원이 되기 전 인권변호사로도 유명했다. 대원외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사법시험(45회)에 합격, 2006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직후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 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을 거쳐 20·21·22대 총선에서 내리 당선됐다.
박 의원은 지난 7일 서울 여의도에서 뉴스핌TV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대학 시절 뒤늦게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그는 인권변호사로서 세월호 피해자 가족협의회 법률대리인을 맡으면서 이름을 알렸다.
정치에 입문해서도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안 통과, 사회적참사 특별법 제정안 통과,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 등 약자 편에 선 법안들을 통과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
사회적 참사와 관련된 배지와 팔찌를 많이 차고 다니는 그는 "배지를 많이 달고 다녀서 '박주렁주렁'이라고도 불린다"며 "(참사 유가족들이) 관련 법이 개정될 때까지 떼지 말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떼겠나. 배지도 4~5개씩 달고 다닐 때가 있었는데, 관련 법이 통과될 때마다 배지를 뗀다"고 말했다. 그는 배지를 달고 다니면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면서 " 이태원 참사 특별법도 이태원 참사 유가족분들이 달아주셨는데 제가 원내수석부대표일 때 협상해서 법을 통과시킨 후에 뗐다. 다만 세월호는 유가족분들과 특수한 관계도 있고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계속 달고 다니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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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핌TV와 인터뷰하는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사진=뉴스핌DB] |
다음은 박 의원과의 일문일답. 자세한 이야기는 뉴스핌TV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어린 시절 어떤 학생이었나
▲ 아주 어렸을 때는 개구쟁이였다. 초등학교 때, 저는 국민학교 때인데 처음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것 자체를 힘들어할 정도였다. 초등학교 2학년쯤부터 공부나 독서에 재미를 붙였는데 중학=교 때는 성적을 위해서, 등수를 위해서 공부하게 되면서 힘들었다. 특히 고등학교를 공부 잘한다는 친구들이 많이 모이는 학교에 가다 보니 성적이 너무 떨어졌다. 고등학교 때는 아예 가학적으로 공부를 했다. 공부만 했다. 친구들하고 대화도 안 하고 밥도 혼자 먹고 수학여행 가서도 단어장 들고 다니고. 외모도 3년 내내 거울을 안 보고 이성에도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땅만 보고 학교에 다녔다. 근데 공부만 하다 보니 건강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첫해 입시는 실패했다. 재수를 했고 제가 얻은 점수에 맞춰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게 됐다. 법대에 진학해서도 사법고시를 보겠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학생운동, 시민사회·노동 운동을 하다가 변호사 자격증이 있으면 더 많은 분을 도울 수 있겠다 싶어서 군대에 다녀와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 원래는 돈을 굴리는 데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 어렸을 때는 동네 돌아다니면서 빈 병, 구리 선 같은 것들을 모아서 팔고 그 돈으로 이제 장난감을 사서 그 장난감을 친구한테 빌려주고 10원씩 받아서 다시 또 장난감을 산다든지 이런 식으로 하는 걸 재밌어했다.
- 대학 때 사회운동에 많이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 고등학교 때 공부만 했다 보니 대학 때 자신을 바꾸고 싶은 욕구가 많았다. 남들이 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기 싫어하거나 안 하는 것도 한번 다 해보자고 해서 막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제가 학생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더라. 학생 운동하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 가장 보람을 느꼈다.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이런 방향으로 인생을 살아야지 했다가 조그마한 철거촌에 갔는데 주민들이 구청장을 만나고 싶어 했다. 주민들이 서울대 법대생이면 말을 잘할 테니 같이 가자고 해서 같이 갔는데, 만남 자체가 성사 안 되더라. 약속하고 갔는데도 (안 만나줘서) 변호사 자격증이라도 있었으면 만날 수 있게 해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 변호사로서 활동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 변호사로서 이름을 좀 날렸다. 시사주간지나 진보적인 언론에서 꼽는 올해의 소송에 수시로 이름을 올렸다. 그래서 경찰들이 제일 싫어하는 변호사이기도 했다.
- '거지갑'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 외모에 신경 안 쓰고 옷차림에 신경 안 쓰고 일에 매진한다는 의미로 붙여주신 별명이다. 저도 항상 인터뷰할 때 '제가 가난하지 않다'는 말을 꼭 하는데 자꾸 저보고 가난 코스프레를 한다고 오해를 받는다. 저도 변호사고 제 짝꿍(아내)도 변호사다. 가난하다고 얘기한 적도 없고 가난하지도 않다. 다만 제가 지치고 힘들 때 줄여 나가는 것 중에 일순위가 씻는 것이다. 그다음 자는 것, 세 번째가 먹는 거다. 그렇게 일을 집중하는 편이다. 그렇게 일해서 중대재해처벌법 합의 처리, 국가보안법 개정 60년 만에 합의 처리,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등등을 처리했다.
또 제가 배지를 많이 달고 다녀서 '박주렁주렁'이라고도 불린다. 지금도 팔찌를 4개 차고 있다. 참사나 사회적 재난 피해자분들이 직접 주신 거다. 관련 법이 개정될 때까지 떼지 말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떼겠나. 배지도 4~5개씩 달고 다닐 때가 있었는데, 관련 법이 통과될 때마다 배지를 뗀다. 의원실에 배지를 모아둔 진열장이 있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도 이태원 참사 유가족분들이 달아주셨는데 제가 원내수석부대표일 때 협상해서 법을 통과시킨 후에 뗐다. 다만 세월호는 유가족분들과 특수한 관계도 있고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계속 달고 다니고 있다.
heyjin@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