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 위해 탈북한 엄마 먼저 한국 정착
의대 공부 뜻 이루지 못하자 탈북 결행
"1인분 이상 몫 해내는 사람 될겁니다"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난 그녀의 아버지는 철도 승무대원이었고, 어머니는 장사를 했다.
1990년대 중후반 대기근 사태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도 전에 전조 증상으로 철도원의 배급이 끊겼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어머니는 장사를 시작했고, 덕분에 윤서 씨는 배고픔 없이 자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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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함북 무산 출신의 채윤서 씨. 동국대에서 회계학을 전공하는 그녀는 "고향을 기억하며 1인분 이상의 몫을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사진=남북하나재단] 2025.11.21 yjlee@newspim.com |
얼마 지나지 않아 승무대원들은 기차를 활용해 장사를 했고, 장사꾼들은 승무대원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 철도 직업이 한창 인기를 끌던 어느 날, 윤서 씨의 어머니는 더 큰 장사를 위해 탈북했고 이후 바로 한국으로 갔다.
윤서 씨는 외가 댁에 맡겨졌고 몇 달에 한 번씩 한국에 있는 어머니와 통화하고, 또 어머니가 보내준 돈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갔다. 하지만 학교와 집만 반복되는 일상은 그녀에게 너무 지루했고, 가끔 엉뚱한 일을 벌이곤 했다.
하루는 창문 사이로 꽃제비 아이들이 보였고 그들에게 "우리 집에 들어올래?"라며 손길을 내밀었다. 윤서 씨는 집에 있는 과자며 사탕이며 온갖 간식들을 다 퍼주었다.
◆꽃제비 집에 들이자 할머니가 "집안 말어먹을..." 한숨
저녁에 할머니가 집에 돌아와 안 보이던 배 한 알을 보고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자, 낮에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그 꽃제비 아이들에게서 배 한 알을 받고 집안에 온갖 간식들을 다 줬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집안 말아 먹을 계집'이라며 한숨을 쉬셨다고 한다.
그녀의 할머니와 이모들은 엄마 없이 큰다고 늘 가슴 아파하시며 금이야 옥이야 윤서 씨를 귀하게 키우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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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탈북민 정착지원 기관인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 |
반면 윤서 씨는 '우리 엄마는 돈 벌러 갔는데, 죽지 않았는데, 근데 왜 내가 불쌍하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엄마가 전화 통화만 하면 한국에 오라고 했고, 수도 없이 브로커를 보내왔지만 할머니와 사는 것이 좋아 탈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엄마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귀한 손녀를 잘 키우는 것은 학교에 잘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딱 한 번 무단으로 결석한 날, 윤서 씨는 세상에서 제일 무섭게 혼이 났다. 그 이후 그녀는 학교를 빠질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성실히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장마당에 예쁜 머리띠 넘쳐나도 학교에선 금지·단속
하지만 학교생활은 날이 갈수록 반감을 일으켰다. 장마당에는 예쁜 머리띠들이 차고 넘치는데 그것을 하고 가면 규찰대가 못 하게 했다. 학교 앞에까지 하고 간 후, 몰래 가방에 숨겨야 했다.
숨긴 머리띠를 들켜 반성문을 쓸 때마다 반감은 커져만 갔다. 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선택할 때 윤서 씨는 사범대학 진학을 꿈꿨으나, 탈북한 어머니가 있어 사범 계열은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혼 상대도 진급할 수 없는 이들 중에서만 골라야 했다. 하지만 의사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지게 되면서 그녀는 철도간호전문학교 1년 졸업 후 간호사가 되었다.
의대에 진학하지 못한 경우, 의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은 관련 업종에서 종사하면서 통신대학으로 공부해 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 거의 많은 업종들이 원격 통신대학으로 전환되면서 의학 부분도 바뀔 것으로 예상했으나, 아쉽게도 의학 부분만 전환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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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회계학을 전공 중인 함북 무산 출신의 동국대 학생 채윤서 씨. 그녀는 다시 떳떳하게 북한 가족과 만날 날을 꿈꾼다. [사진=남북하나재단] 2025.11.21 yjlee@newspim.com |
그녀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북한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아 2019년 탈북을 결심했다.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녀는 한국에 와서도 같은 꿈을 꿨을까?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꿈이었지만, 간호사 일을 하면서 겪었던 트라우마로 인해 의사의 꿈을 접었다고 한다.
생사를 오가는 환자들이 항생제와 약을 구해오지 못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 힘들었다. 한국에서 엄마가 보내준 쌈짓돈을 털어 몇몇 환자들에게는 항생제를 사주기도 했으나, 계속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생살을 후벼 파는 수술실에서 몇 번이고 기절한 적도 있었다. 탈북 후 그녀는 다시는 주변에 환자를 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의 꿈은 무엇일까? 마음을 훔친 꿈은 뜻밖의 장소에서 일어났다.
한국에 와서 처음 마트에 갔을 때 물품의 가격들이 1990원, 9990원으로 되어 있는 것이 신기했고 궁금했다. 바로 인터넷에 검색해보고 관련이 있는 마케팅 혹은 회계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중 숫자에 더 관심이 많아 회계학을 전공했고, 학부 공부는 생각했던 대로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학부를 마칠 즈음, 학과장 면담에서 대학원 입학 제안을 받았고, 그녀는 무직으로 세무사 준비를 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 입학을 결심했다.
다들 힘들다고 하는 회계 공부를 흥미롭고 재미있게 하는 그녀. 그녀는 세무사가 되는 것만이 꿈은 아니라고 한다.
자신의 진짜 꿈은 한국에 와서 받은 많은 혜택을 잊지 않고, 고향을 기억하며 1인분 이상의 몫을 해내는 것이다.
엄마가 없었지만 조금의 부족함도 느끼지 않고 클 수 있게 해준 고향을 잊지 않고, 다시 만나는 그날 떳떳하게 만날 수 있게 살고 싶다는 그녀의 꿈을 응원한다.
<뉴스핌-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yjlee@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