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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D 셀럽에 길을 묻다] ① 영화감독 이장호 "돈키호테 같은 저돌성이 나를 만들었다"

기사입력 : 2024년08월08일 16:00

최종수정 : 2024년08월08일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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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한국영화사를 흔히 '별들의 고향'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 1970년대 청년문화를 선도했던 최인호 원작, 이장호 감독의 영화 '별들의 고향'이 개봉 50주년을 맞았다. 데뷔작이 히트작이 됐던 이장호 감독도 올해로 감독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젊은 세대들에게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이라는 명대사로 잘 알려진 '별들의 고향'은 우리 영화의 전성기를 열었던 작품이었다.

이장호 감독은 1945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 건축미술학과를 수료했다. 대표작인 '별들의 고향'(1974)에이어 '어제 내린 비' (1974)도 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한동안 칩거해야 했다. 그후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어둠의 자식들'(1981), '과부춤'(1983), '바보선언'(1983) 등 사회성 짙은 작품들을 연출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칼리가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어우동'(1985)은 당시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면서 흥행에 성공한 영화였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영화감독 이장호. 2024.08.08 oks34@newspim.com

이장호 감독은 1996년부터 중부대학교, 전주대학교, 서울예술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제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1977), 사단법인 한국영화감독협회부이사장(2000), 전주시 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2001), 제1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2005),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조직위원회부위원장(2007)을 맡기도 했다. 현재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이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2002년 서울시문화상, 2003년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현재 사단법인 신상옥기념업회 이사장과 서울영상위원회 위원장, 최인호청년문화상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장호 감독은 현실과 영화의 거리를 좁히는 작품들로 정권에 순치돼 온 충무로의 관습을 깨고 사회성 짙은 작품을 만들었던 기린아였다. 청춘물로 시작하여 시대의 아픔을 담아내는 리얼리즘 영화를 만들고, 한때는 강렬한 섹스물로 극장의 흥행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장호 감독이 고등학교 동창인 소설가 최인호의 작품 '별들의 고향'을 영화로 만들어서 데뷔작이 출세작이 된 이야기부터 사회성 있는 작품과 에로틱한 영화를 넘나들었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대담은 이장호 감독과 영화계 선후배 감독으로 오랫동안 교유해 온 영화감독 이무영(동서대 영화과 교수)이 진행했다.

이하 대담전문.

- 이무영 감독: 감독님 반갑습니다. 감독님이 이제 영화계에 모습을 드러낸 지가, 그러니까 데뷔하신 지가 50년이 됐거든요.
이장호 감독: 그렇게 됐어요.
- 이무영 감독: 데뷔작인 '별들의 고향'이 50주년을 맞이했다는 뜻이 되는 건데, 이 영화를 50년 만에 다시 보신 느낌이 어떠신지요?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은데…. 그리고 지난 50년을 돌아보면 요즘은 어떤 느낌이신지 한번 듣고 싶습니다.
이장호 감독: 난 근질근질할 것 같아서 걱정을 했는데, 빠져드니까 그냥 처음 보는 것처럼 또 보게 되더라고요. 하도 오래돼서. 아이들은 텔레비전에서 '별들의 고향' 한다고 해서 봤죠. 잠자고 있는데 깨워서 나가서 보면 마음이 상할 때가 있는 게…. 난 진지하게 빠지는데 애들은 웃는 거야.
슬픈 장면에서 막 웃으면서. "되게 웃긴다" 그러고(웃음). 그럼 이게 날 모욕하려고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고. 젊은 관객들은 우리 때 젊은 관객하고 또 달라져서 자기중심이고. 어, 뭐라 그럴까. 더 개인주의가 된 것 같아요. 아이들이. 자기 감각이 더 소중하고. 아버지지만 예의를 좀 갖춰줬으면 좋겠는데. 좀 겁이 나요. 젊은 사람들하고 볼 때는.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영화감독 이장호가 서울 여의도 본사 스튜디오에서 영화 '별들의 고향' 50주년을 맞은 소회를 밝히고 있다.  2024.08.08 oks34@newspim.com

- 이무영 감독: 그게 아마도 그 명대사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50년이면 시대가 엄청나게 많이 변했잖아요. 우리가 언어를 쓰는 어떤 태도도 변하고. 그런데서 오는 괴리가 있지 않을까요? 그런 어떤 상황을 만드는 것 같은데. 저는 아직도요. 예전에도 봤지만 예전의 감성으로 보고. 물론 그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이런 대사들이 그때의 감성으로 보면 감회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이장호 감독: 그 때도 코미디언들이 많이 그렇게 했거든요.
- 이무영 감독: 패러디를 한 거지요.
이장호 감독: 그래서 나는 이게 웃기는 대사가 아닌데. 나는 진지한 대사인데. 오히려 좀 간지러운 대사가 "제 입술은 작은 술잔이에요." 뭐 그런 게 난 더 좋아요. 예쁘잖아요. 그런 얘기가 회자됐으면 좋겠는데 그건 안 되고.
- 이무영 감독: 오늘 이 방송이 끝나면 그 대사도 회자가 될 것 같습니다. 감독님, 사실 데뷔작을 만드셨을 때 나이가 굉장히 젊으셨잖아요. 그리고 그렇죠. 조감독으로서 경험도 물론 연출부로서 오랫동안 신상옥 감독님 밑에서 수학을 하시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 어떻게 이 영화를 연출하게 되셨는지, 그 배경이 궁금하거든요. 좀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 '별들의 고향' 연출하려고 선배들 찾아다니면서 책도 팔았다

이장호 감독: 내 계획에 있었던 작품이 아니고, 최인호가 가까운 친구였으니까 최인호가 신문 소설을 처음 썼고 그때도 내가 영화 만든다는 실감을 못 가졌어. 신문 소설을 읽으면서 너무 재미있으니까 점점점 욕심이 나고 책을 읽으면 항상 영상이 떠오르잖아요. 머릿속에 그걸 자꾸 영상화 생각을 하다가 홍콩에 갔는데 아버지까지 이제 신문 연재된 거를 계속 보내주시더라고. 홍콩에 한 1년 있었는데 연재된 거를 다 오려서 보내주고 그러니까 점점점 현실적으로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돌아오니까 신문 소설은 끝났고 이제 단행본으로 출판했단 말이에요. 그게 베스트셀러가 된 거예요.
- 이무영 감독 : 그랬군요.
이장호 감독: 그러니까 그때서야 조감독 입장에서 최인호한테 "야 이거 내가 영화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하기가 굉장히 뻔뻔스러운 것 같고 관심은 있는데, '조선일보'에서 영화화 경쟁이 붙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그 당시에 유명한 정소영 감독, 최인현 감독이라고 그 당시에 거장이 있었고, 홍파 감독 거기에 네 번째로 신필름의 조감독 출신인 이장호가 나온거지. 내가 나와서 이름을 날렸어. 이게 동기동창의 황수원씨 아들이 '조선일보' 문화부 말단 기자였거든. 얘가 그 기사를 썼어. 이장호를 고쳐준 거야. 그거 보니까 갑자기 현실감이 확 살면서 신문에 이름이 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때인데 "야 이거 이번에 뛰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도전이지. 그래서 이제 최인호 한테 "야 이거 내가 영화하고 싶다"고, 어 입에서 안 나오던 말을 했어. 최인호가 처음엔 쉽게 "아유 당연하지" 그랬거든.
- 이무영 감독: 이야, 그 친구 아빠 찬스처럼 일단 친구 찬스를 쓸 기회가 생긴 거군요.
이장호 감독: 그때부터 이제 하려고 했는데 최인호가 하루는 걱정스럽게 "야 이거 계약할 때 이 모든 걸 출판사 사장이 좌우하게 돼 있다" 이거야. 생각지도 않은 장애물이 생겼지. 최 사장 만나가지고 "이거 오래 전부터 내가 이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던 작품이다." 했지.
- 이무영 감독: 그 분은 출판사 사장이죠.
이장호 감독: 그랬더니 "아니 그거 다 아는데 영화는 영화고 출판은 출판이고 출판에 지장을 줄까 봐 지금은 계획을 세우지 않겠다. 판매 부수가 충분히 자기 마음에 들 때 그때 이제 영화를 생각해 보겠다" 이런 거예요. 쉽게 잘 나간다 했는데 그게 장애가 딱 생겼어. 옛날부터 좀 돈키호테의 기질이 있었는데 "제가 책을 좀 팔아드리겠습니다." 이제 이렇게 막 나갔지. 그래서 총동창회 명부를 갖다가 기업의 총수들 회사마다 골라가지고 무작정 찾아가는 거야. 찾아가서 "아 고등학교 후배라고 그러고 최인호 하고 친구인데 이를 제가 영화를 만들려고 합니다. 책을 좀 사주십시오." 이제 그러니까 너무 좋아하는 거야. 그 사람들이 그러지 않아도 신문 소설로 인기가 많았던 거고 그러니까 "아 그래, 여기 한 100권 갖다 놔." 뭐 그렇게 해서 부수가 싹 올라가니까 출판사 사장이 놀란 거야. 개인이 팔면 얼마나 팔까 했는데 이게 보통 부수가 아니거든.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영화감독 이장호(사진 오른쪽)가 후배 영화인인 이무영 감독(동서대 영화과 교수)과 대담을 나누고 있다. 2024.08.08 oks34@newspim.com

- 이무영 감독 : 대단하셨네요.
이장호 감독: 그러니까 영화하게 되면 이장호 한테 제일 먼저 선택권을 주겠다. 그 소리만 들어도 뭐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몰라. 하나 써주십시오 그랬어. 그랬더니 이제 각서 각서를 써주더라고. 네 아무래도 내가 의심스러운 게 출판사 사장이 설마 이 결정권을 갖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드니까 최인호를 녹여야겠더라고. 그래서 이제 동생 불러가지고 "야 너 이번 등록금 하지 말고 다음 기회, 다음 기회하고 이걸 나 좀 빌려주라"고 그랬거든. 뭐 착한 동생이니까 "그러라고, 그 대신 내가 너 배우 나중에 시켜줄게" 이렇게 된 거야. 그걸 갖고 이제 최인호 집에 찾아갔지. 마침 최인호가 없어서 최인호 부인한테 "들어오면 이거 좀 전해주라"고 그러니까 "이게 뭐예요?" "선물이라고 생각하라"고 그러고.
- 이무영 감독: 사실은 작가 계약금인 셈이었군요.
이장호 감독: 그래놓고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최인호가 술이 잔뜩 취해가지고 전화가 왔어. 욕이 뭐 한참 나오더라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니가 알아서 해." 딱 이러더라고.
- 이무영 감독 : 그건 이제 허락을 받은 거네요.
이장호 감독 : 그렇지. 그러니까 양쪽 다 된 거지. 그러면서 이제 뛰기 시작하니까 경쟁이 붙었고 보고 이장호가 가졌다 이렇게 되잖아요. 신문에 나고 그러니까 진행이 빨리 되더라고요.

◆ 초등학교 시절부터 글짓기대회 휩쓸고 다녔던 천재 최인호

- 이무영 감독: 근데 그 동생의 등록금을 소위 강탈해서 그 계약금 형식으로 최인호 작가에게 준 게 일단은 주효했던 것 같네요. 여기서 말씀드리면. 감독님에게 돈을 빼앗긴 그 순한 동생은 나중에 70년대 대배우가 되는 이영호 배우죠?
이장호 감독: 그 다음 작품인 '어제 내린 비'의 주인공으로 영호를 썼지.
- 이무영 감독: 그 약속을 지키신 거네요. 동생과.
이장호 감독: 그렇지.
- 이무영 감독: 자 그러면 저희가 이제 최인호 작가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사실은 서울고등학교 다니실 때 처음 만나셨고 그 다음에 여러 관계의 변화들이 있으셨을 거 아니에요. 최인호 작가와 감독님의 관계에 대해서 조금 말씀해 주시죠.
이장호 감독: 덕수초등학교 다녔지, 덕수초등학교에 같이 다녔거든. 근데 전체 조회 학생들 앞에서 교장 선생님이 최인호를 호명하면 최인호가 아장아장 걸어가는 것 같아. 너무 작은 아이라 교단에 올라가면 교장 선생님이 "서울시 무슨 무슨 글짓기 대회 장원 받았다." 그래서 하고 한두 번이 아니고 자주 있었어. 그러니까 얘가 글을 잘 쓰니까 그런 글짓기 대회에 나가면 항상 상을 받아 갖고 오니까. 나는 학교 성적도 나쁘고 좀 열등한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부러운 거지. 전체 전교생 시선이 걔한테 집중 되잖아. 그게 부러우니까. 나는 교장 선생님 교단 뒤에 있는 게양대에 올라가는 거야. 상상으로. 그러면 아이들이 전부 최인호를 보는 게 아니라 나를 보는 거. 그런 상상하고 하는 것 때문에 이제 최인호를 인상 깊게 봤지.
- 이무영 감독 : 그러셨군요.
이장호 감독: 그러다가 서울중학교 같이 들어갔는데 하루는 국어 시간인데 작문 선생이 최인호를 불렀더니 "이거 니가 쓴 거 맞아?" 그러더라고.
"네, 틀림없습니다." 최인호가 아주 야무지거든. "그래, 믿을 수가 없는데 한 번 반 학생들 있는 데서 읽어보라"고 하더라고. 최인호가 읽는데 아이들이 다 나가 자빠졌지. 중학교 1학년이 썼는데 연애 소설이야. 어이가 없지. 근데 나는 초등학교 때 그 최인호를 봤으니까 틀림없이 최인호 글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 이무영 감독: 뭐. 물론 최인호 작가가 굉장히 좀 뛰어난 문학적으로 그렇지만 감독님이 그때 "야 나는 저 국기 게양대에 올라가서 다른 친구들의 주목을 받겠다"라는. 사실 시각화 하는 거잖아요. 영화감독으로서 어떻게 보면 그런 상상력은 더 있으셨던 것 같으네요. 근데 두 분의 관계가 이제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잖아요. 그리고 사실 이제 감독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는지 다 아는데 그 이후로 두 분의 관계는 또 어떻게 변하셨는지.


이장호 감독: 이상하게 감수성이 맞는다는 생각이 드는 게 얘가 휘파람을 잘 불어. 나도 휘파람을 잘 부는데 휘파람으로 'Count My Garden in Italy'라는 팝송이 있었는데 그거를 우리 시대 아이들이 잘 부를 수 없는 노래인데. 아주 옛날 거니까. 그거를 멋지게 부르고 그래. 그러면 참 신기한 게 우리 아버지가 부를 팝송을 얘가 부르고 그런 게 자꾸 호감이 가게 돼. 대학 때 나는 이제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신필름에 들어가면서 영화를 하게 되니까. 그게 소문이 이제 아이들한테 난 거야. 이장호가 공부 안 하고 영화판에 들어갔다고. 한 번은 프레스센터 뒤에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났어. 최인호가 "야 너 뭐 저기 영화판에 들어가서 조감독 한다며?" 그러더니 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소망이 영화감독이었어"라고 한 거야.
- 이무영 감독: 네, 최인호 작가가.
이장호 감독: 엄청 조숙한 거야. 나는 조감독 하면서도 영화가 뭔지 잘 모르는데 영화감독을 꿈꿨다는 게 참 신기하다고. 항상 내가 한 수 접고 들어가야 되는 게 세상 물정도 밝고 현실적이고 영리하고. 그러니까 이제 호감이 생기니까 자꾸 프러포즈처럼 내가 이제 최인호한테 접근하는 거지. 최인호가 귀찮아하지 않고 항상 뭐라고 그러냐면 "아 넌 애가 굉장히 순진하구나." 나한테 그런거야.
- 이무영 감독: 감독님 그렇게 순진한 분은 아니셨잖아.
이장호 감독: 그때는 말하는 게 어수룩했던 모양이지. 근데 그 말이 기분 나쁘지가 않고. 왜냐하면 나보다 훨씬 영리하고 현실적이고. 그러니까 자꾸 그런 상태로 둘이 대화가 되고 접근하다가 이제는 어느 정도로 됐냐면 걔네 집에 놀러 가면 자기가 대학 노트에 쓴 습작들 그거 보여주고 그러면 그 악필인데…. 이제 그 글씨를 잘 읽게 될 정도로 자주 읽게 됐다고. 최인호도 신기한지 "야, 우리 형만 네 글씨 알아보는데 너도 이제 읽는구나" 이렇게 된 거야. 그때부터 이제 최인호가 새로 쓰면 내가 보게 되고 보게 되고 이제 가까워진 거지.
- 이무영 감독: 그러면 이제 '별들의 고향'은 시대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의미 있는 작품이고 굉장히 많은 분들이 봤잖아요. 그 영화가 이제 그렇게 대성공을 거둔 다음에 감독님의 삶도 많이 바뀌었을 것 같아요.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영화 '별들의 고향' 개봉 50주년을 맞은 영화감독 이장호.  2024.08.08 oks34@newspim.com

◆ 영화계의 유혹과 도전에 맞서야 했던 순간들

이장호 감독: 최인호도 나보고 천진난만하다고 그러고 그랬는데 영화감독 하고 나서 '별들의 고향'의 성공이 실감이 나지 않고 얼떨떨했어. 나한테 그런 재능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했는데 어쨌든 텔레비전 출연 자꾸 하게 되고 신문에 오르락내리락 하고 그러니까. 아마 바보 같아도 점점 오만해지기 시작 하더라고. 이게 현실인가 현실인가 하면서도 우쭐해지고. 어떤 유혹에 빠졌냐면 다른 영화사에서 프러포즈가 왔어. 내가 '별들의 고향'에서 받은 액수의 5배를 주는 거야. 혹해서 이제 당연히 가야지 하면서 계약했지. 화천영화사. '별들의 고향' 영화사는 다음 작품 당연히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딴 데로 옮기니까 괘씸해서 보너스고 뭐고 없는 거라. 그 회사에서는 안 되겠다 싶었어. 최인호라도 잡아야 돼. 이렇게 된 거지. 그래서 최인호 한테 상당히 큰 액수를 주면서 '바보들의 행진'을 이제 준비를 하는 거예요.
- 이무영 감독: 파란만장 했네요.
이장호 감독: 나는 몸만 빠져나가는데 갑자기 최인호가 없어지니까 머리를 쓰다가 최인호의 미완성 소설이 있어. 그래서 최인호 한테, "그 '정원사' 내가 영화 만들고 싶다"고 하니까 "그걸 미완성으로 어떻게 만드냐" 고. 그러더라고. "꾸려보겠다"고 이제 그렇게 했지. 근데 최인호도 작품을 많이 쓰다 보니까 그 '정원사'의 방향이 최인호의 단편소설에 '침묵의 소리'라는 게 있더라고. 침묵, 침묵의 소리. 그리고 그거를 '중앙일보' 장편소설 신문소설부터 연재를 시작했거든. 그게 '내 마음의 풍차'야. 그래서 난 이제 김승옥 형한테 시나리오를 부탁했지. 소설가인 김 작가와 같이 순천에 내려가서 시나리오 쓰는데 승옥이 형이 또 쓰다가 보니까 자꾸 '내 마음의 풍차'처럼 가는 거예요. 방법이 없지, 뭐. 시작이 그러니. 최인호는 이제 그 눈치를 못 챘지.
- 이무영 감독 : 그래서요?
이장호 감독: 어떻게 보면 내가 배신 때린 거나 마찬가지인데. 완성되고 나니까 영화사에서 너무 좋다고 그러니. 제목을…. 이제 최인호 찾아가서, "야. 그거 '정원사' 시나리오 완성됐어. 승옥이 형이 이제 시나리오 됐는데 제목을 좀 지어달라"고. 그러니까 최인호가 제목을 잘 지어. '어제 내린 비'라는 제목을 주더라고요. '어제 내린 비'. 나도 너무 마음에 드는 거지. 감각적이잖아. 그렇게 해서 영화를 만드는데 그것도 또 흥행에 성공한 거지. 거기까지 나갔는데. 그다음에 '바보들의 행진'을 히트시키지 뭐. '어제 내린 비', '바보들의 행진'. 다 히트를 했단 말이야.

oks34@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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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문의 화랑담배] 제2회 광복군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 가릉호텔에서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창설식이었다. 미국 한인 동포들이 보내온 돈 4만원으로 조직한 군대였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억 원 정도 된다.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 참모장 이범석 장군, 제1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장 고운기, 제3지대장 김학규, 제5지대장에 나월환을 임명했다. 지대장은 지금의 사단장에 해당한다. 모두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를 비롯하여 남북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에 직접 참여하여 활동한 독립군 출신이었다. 한국광복군 훈련반 제1기 졸업사진. [사진= 독립기념관]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포고문을 통해 "국내외 동포들에게 알립니다. 1940년 9월 17일부로 대한민국 광복군을 창설하였습니다. 광복군은 1907년 8월 1일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 날이 바로 광복군 창설일임을 선언합니다. 광복군은 구 한국군의 후신으로 33년간에 걸친 의병과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을 계승한 전통 무장 조직입니다"라고 했다. 대한제국 국군-의병-독립군의 군맥(軍脈)과 군혼(軍魂)을 분명하게 잇고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부대 편성은 소대, 중대, 대대, 연대, 여단, 사단 6단으로 편성하였다. 총 3개 사단을 조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원이 적은 상황에서 우선 지대를 만들고, 각 지대를 구대와 분대로 연계한 전투부대를 구성했다. 임시정부에서 1940년 9월 19일 중국 국민당 정부에 통보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직원 명단'에 의하면, 부대 규모가 총사령부와 4개 단위부대, 여기에다 조선혁명군 부대까지 포함하여 5000여 명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1941년 12월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1942년에는 미국 측에 "미국이 제주도를 해방 시켜 주면,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제주도로 옮긴 후,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한반도 상륙작전을 전개하겠다."라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실제로 미국 OSS 부대(지금의 CIA)와 1945년 4월부터 8월까지 강도 높은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주요 훈련은 3개월 기간에 고공낙하, 암살법(권총에 특수장치를 하여 소리 없이 암살하는 방법), 통신(암호의 작성 및 해독법, 무전기 조작 및 수리), 교란 행동, 정보수집, 폭파 등 이었다. 일과는 07:00∼12:00 오전 훈련, 13:00∼18:00 오후 훈련, 19:00∼22:00 야간 훈련이었다. 주요 임무는 대한민국으로 낙하산과 잠수함으로 침투하여 미 공군 공습에 필요한 지형 등의 정보를 제공하고 일본군 군사시설 탐지 및 파괴 지하 유격대를 조직하여 연합군 상륙작전 시 제2선에서 연결하는 작전이었다. 마침내 1945년 8월 7일 모든 훈련을 마치고 국내진공작전 출정식을 개최했다. 개시일은 8월 10일이었다. 출정식 때 장준하 경기도 공작 반장은 "나는 조국광복을 위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내가 나의 죽음을 지불하면, 내 능력껏 그 대가가 조국을 위해서 결제될 것입니다. 나의 각오는 한 장의 정수표입니다. 발생인은 장준하, 결제인은 조국입니다"라는 유서까지 작성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2025-09-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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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이시바' 누구?...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 [서울=뉴스핌] 오영상 기자 =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자민당 총재직 사임을 공식화하면서, 일본 정국의 관심은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로 쏠리고 있다. 집권당 총재가 곧 총리직을 맡는 일본 정치 구조상 이번 총재 선거는 사실상 다음 총리를 뽑는 절차다. 자민당은 조만간 새로운 총재 선거 일정을 확정할 예정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난 2024년 9월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총리와 경합했던 주요 인사들이 다시 출마할 가능성이 높다.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 등이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정국 운영이 소수 여당이라는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차기 총재가 야당과 어떻게 연대할지, 어떤 연립 구도를 짤지가 최대 쟁점으로 꼽힌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고 있는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권 현재 여론조사에서는 고이즈미 농림수산상과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이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지난달 29~3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기 총리에 적합한 인물로 다카이치가 23%, 고이즈미가 22%를 기록했다. 나란히 1, 2위다. 자민당 지지층으로 한정하면 고이즈미가 32%로, 다카이치(17%)를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카이치는 2024년 총재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에게 역전패했다. 고이즈미 역시 의원 표에서 선두에 올랐지만 당원 표에서 밀리며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당내 기반과 대중적 인지도를 겸비해 차기 선거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주자들이다.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1981년생(44세)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이다. 2009년 중의원 첫 당선 이후 줄곧 '포스트 아베',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았다. 환경상, 농림수산상을 거쳤으며 개혁 성향과 젊은 이미지로 지지층을 넓혔다. 2024년 총선에서 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으나 참패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농림수산상으로 복귀해 쌀 유통 개혁 등 농정 개혁에 매진했다. 대중적 인지도와 '고이즈미 브랜드'라는 정치 자산이 최대 강점으로 꼽힌다.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은 1961년생(64세)으로 보수 강경파로 분류되는 여성 정치인이다. 2021년 총재 선거에 첫 도전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3위를 기록했다. 2024년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최다 득표(의원 72표, 당원 109표)를 얻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 총리에게 역전 당했다. 유일한 여성 후보로서 '보수의 아이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아베 전 총리와 가까웠던 의원 그룹이 주된 지지 기반이다. 이시바 정권에서 당직 제안을 거절하며 독자 노선을 유지해 왔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일본 경제안보담당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하야시·모테기 등 잠룡도 주목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두 선두 주자 외에 잠룡들의 행보도 주목된다.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옛 기시다파 일부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시바 정권의 2인자로서 존재감을 키워왔다.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은 당내 경험과 풍부한 인맥을 강점으로 삼고, 아소 다로 전 부총리와 교류를 통해 지지 기반을 다지고 있다.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은 5선 의원으로, 동기 의원들과 옛 니카이파의 지원을 받으며 출마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 총재 선거 이후에도 정국 '안갯속' 자민당 총재 선거는 국회의원 표와 당원·당우 표를 합산하는 방식이 원칙이지만, 긴급 시에는 국회의원과 지방 지부 대표만 투표하는 '양원 의원 총회' 방식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 경우 의원 표의 비중이 커져 파벌 역학이 중요해진다. 차기 총재가 선출되더라도 곧바로 정권 안정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일본 헌법상 총리는 국회에서 지명되는데, 자민·공명 양당은 현재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에서 과반을 잃은 상태다. 따라서 야당이 단일 후보를 세워 결집할 경우, 자민당 총재가 총리로 지명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민당 총재가 총리에 오르더라도, 예산안·세제 개혁 법안 등 국정 운영은 야당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차기 총재는 곧바로 '연립 확대'나 '정책 연대'를 추진할 수밖에 없고, 총재 선거 과정에서도 어떤 야당과 손을 잡을지가 핵심 화두가 된다. 결국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는 단순히 차기 지도자를 뽑는 절차를 넘어, 일본 정치가 다당제 속에서 어떤 연립 구도를 구축할지 시험대가 되는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goldendog@newspim.com 2025-09-0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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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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