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개정안, 거부권 행사로 다시 제자리
'경영권 침해'에 반대..."주주 권리부터"
[서울=뉴스핌] 송기욱 기자 =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오랫동안 주식을 보유해온 지방의 한 상장기업 주주인 그는 올해도 어김없이 주주총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배당금은 왜 늘었는지, 재무제표에 적힌 숫자들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직접 설명을 듣고 싶어했다.
하지만 주총은 평일 오전, 근무시간을 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주총장에 가지 못했다. "전자주총이라도 된다면 좋았을텐데..." 퇴근 후 공시를 뒤늦게 읽은 친구는 내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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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송기욱 기자 = 2022.02.11 oneway@newspim.com |
최근 국회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은 이런 개인 투자자들의 현실을 바꿀 가능성을 열었다. 주주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법안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고, 일정 규모 이상 상장사에 전자주주총회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제도를 도입해 소수 주주의 목소리가 이사회에 반영될 수 있도록 했다. 주총장을 찾지 못하는 평범한 주주들, 즉 상장사 주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이 법안의 주요 수혜자였다.
그러나 거부권 행사로 법안은 다시 좌초됐다. 거부권을 행사한 한덕수 총리는 개정안이 기업 경영을 위축시키고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재계와 일부 보수진영에서도 "경영권 침해 우려가 있다", "해외 투기자본이 기업을 흔들 가능성이 크다"고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한 소액주주 대표는 "국회의원이 자신을 뽑아준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이사도 자신을 뽑아준 주주를 위해 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왜 소액주주들의 목소리를 부정적으로만 판단하는가"라고 토로했다.
반대 측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전자주주총회 의무화는 중소 상장사에 비용 부담을 줄 수 있고, 집중투표제나 감사위원 분리선출은 의사결정의 신속성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다. 특히 단기적인 투기 세력이 소수 주주 권한을 악용해 경영을 교란할 수 있다는 점은 경계해야 할 위험이다. 재계에서는 이런 변화가 기업의 자율성을 제한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상법 개정안의 본질은 기업을 옥죄는 데 있지 않다. 주주가 회사의 일부를 소유한 '주인'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창구를 열자는 취지다. 전자주주총회는 물리적 참석이 어려운 이들에게 실시간 소통의 기회를 주고,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는 주주에 대한 책임성을 강화한다.
무엇보다 의사결정 과정이 투명해지면 장기적으로 기업 신뢰도가 높아지고, 이는 해외 투자자들에게도 매력적인 환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투명한 경영은 단기적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지속 가능한 성장의 토대가 된다.
주주는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다. 친구처럼 주총 날 직장에 있어야 하는 이들도 회사의 미래를 함께 고민할 권리가 있다. 상법 개정안은 그 작은 문턱을 낮추려는 시도였으나, 거부권으로 또다시 막혔다. 기업 경영의 효율성과 주주 권리 보장, 두 가치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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