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절상 압력의 파고가 높아졌다. 미국이 중국, 일본에 이어 한국에까지 총부리를 겨누는 형국이다. 바야흐로 강대국간의 총성없는 "환율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국내 외환시장은 대내외적으로 원화절상 요인만 부각되고 있다. 외환당국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고 있으며 환율은 불안정한 대내외 정세 속에서 요동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와 함께 국제 금융시장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계(視界)제로(0)"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한편으로 미국 등 강대국의 환율 공세가 거세질수록 시장 참가자들의 무력감도 한층 커지고 있다. 일방적인 해외 풍랑에 휩쓸려 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 이와 함께 당국의 위기 관리능력도 시험대에 올랐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로 떠밀릴 것인지,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역전극을 연출할 것인지, 외환시장은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빠져들고 있다.◆ 미국, "원화절상 불가피하다"미국 워싱턴에서 이틀간 비공개로 열린 한미 재계회의 직후인 23일(현지시각) 한국측 위원장인 조석래 회장은 "미국 측 참석자들은 중국이 위안화를 한꺼번에 25% 절상해야 한다고 말했다"며 "이 경우 한국의 원화도 10% 정도 절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개진했다"고 전했다고 일부 외신과 언론들이 보도했다. 현 수준에서 10%는 1,050원 언저리를 의미한다. 최근 금융회사나 경제연구소에서 연말 환율전망을 하향 조정한 수치 가운데 가장 낮은 '1,080원'보다 훨씬 낮고 외환위기 발발 직전인 1997년 11월 수준이다. 이같은 견해는 프레드 버거스텐 국제경제연구소(IIE)원장이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버거스텐 소장은 미 달러화 약세인 상황에서 중국 위안화 절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중국이 위안화 가치를 서서히 올리면 투기세력이 위안화 사재기에 나설 우려가 있어 단기간에 대폭 절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논리를 편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즉각적이고 명확한 수치까지 들었다는 점에서 시장은 일정부분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근 미국 재계의 아시아국가의 개입이나 자국통화 약세 유도 등에 대한 불만과 궤도를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 미 제조업자들은 의회에 활발한 로비를 전개하고 있으며 미 회계감사원(GAO)은 최근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대만 등을 '환율조작국' 혐의가 있다고 지목, 압박을 가하고 있다. 경제연구소 소장이 밝힌 개인 견해의 성격이 짙지만 미 재계의 요구사항이 어느정도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중국 위안화에 대해서는 직접적이고 강력한 절상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반면 원화는 '불가피하다'는 측면을 내세웠다는 것. 미국 측이 국가별로 수위조절에 나서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충분하다. 미국은 각개격파에 나서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추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환율은 점차 경제의 영역을 벗어나 정치의 테마로 넘어섰다. ◆ 재경부, "개인 견해다. 의미없다"이같은 버거스텐 소장의 견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일단 "개인 의견에 불과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미국 정부나 재계의 공식적인 의견이나 권고가 아니라는 것. 이에 따라 재정경제부는 '10% 원화절상' 발언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다. 미 행정부가 직접 나서면 적극 대응하겠지만 사견이기 때문에 외환시장이 흔들릴 이유가 없다고 보고 있다.재경부 관계자는 "사설 경제연구소장이 회의석상에서 얘기했고 한국측 위원장이 이를 전달해 확산된 경향이 있다"며 "또 최근 환율이 주시를 받고 있다보니 그렇게 얘기가 커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는 외환당국의 강경한 환율 개입은 계속될 것이란 전망을 가능케 한다. 미국의 공식 견해라면 외교적인 수사 등을 동원, 은근슬쩍 압력을 넣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지는 않는다. 국가대 국가간의 관계에서 명확하게 적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 부시 행정부에서 원화에 대한 언급은 없는 실정이다. 미 의회 일각에서 위안화나 엔화에 원화를 묻혀서 발언하고 있는 정도다. 재경부는 또 이같은 의회 주장에 대해 충분히 반박할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외국계은행의 한 딜러도 이와 관련,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며 "미 제조업계 얘기를 대변하는 요소정도로 생각하며 한국 정부도 이에 대해 부인했기 때문에 당장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결은 도도하다...그러나 시장은 "대세를 바꿀 수는 없다"는 인식이 넓게 퍼져있다. 이미 "환율전쟁"은 포성을 울렸고 원화는 이에 편입돼 있는 상태다. 미 달러 약세의 흐름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6월경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미 제조업계의 '(아시아통화 약세에 대한) 칭얼댐'이 점차 힘을 붙여 미 내부의 정치 문제화됐고 미 행정부는 이를 다시 국제사회로 끌고 나갔다. 존 스노우 재무장관은 9월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부터 지난주말 선진7개국(G7)회담까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성과물을 얻어냈다. '시장 환율주의'라는 원칙론을 국제사회에 재확인시키며 명분도 나름대로 얻어냈다. 국내 외환시장은 이같은 국제사회의 흐름에 일단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펀더멘털 차이로 디커플링(차별화)을 해야 한다는 (당국의) 주장은 '국제 정치'가 가미된 글로벌 달러 약세를 누르기엔 힘이 부친다. 원화만 '독야청청(獨也靑靑)'하기엔 시장의 눈초리가 매섭다. 시장과 적정수준에서 타협을 보며 국제사회의 압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시중은행의 한 딜러는 "현재 환율은 미국 등의 정치적인 계산까지 깔려 있다"며 "국제적인 역학구도 등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뉴스핌 Newspim] 이김준수 기자 jslyd012@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