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같은 대만 출신 TSMC 대신 삼성 선택
이재용, 4년 전 사업재편과 비즈니스 관계 재정립
트럼프와의 만남도 무산…서초동에 갇힌 '뉴삼성'
[서울=뉴스핌] 김선엽 기자 = 삼성전자가 최근 미국 반도체 시총 1위 기업으로 뛰어 오른 엔비디아(NVIDIA)의 신제품 그래픽칩(GPU)를 생산하기로 했다. 대만 TSMC가 도맡던 엔비디아 물량을 삼성전자가 수주한 것이다.
엔비디아는 지난 2014년 삼성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특허 침해를 이유로 맞소송을 걸며 첨예하게 다투던 사이로 이번 GPU 생산을 계기로 적에서 동지가 됐다.
삼성전자는 이번 수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반도체 비전 2030'에 속도가 붙는 모습이다. 다만 서초동에 여전히 갇힌 이 부회장의 사법리스크 현실상, 그의 원활한 글로벌 인맥네트워크 가동은 아쉬움을 높이는 부분이다.
엔비디아 [사진= 로이터 뉴스핌] |
2일 반도체 업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지난 1일(현지시간) 차세대 GPU '지포스 RTX 30' 시리즈를 공개하고 이 신제품을 삼성전자의 8나노미터(㎚) 파운드리 공정을 통해 생산한다고 밝혔다.
GPU는 CPU에 비해 여러가지 복잡한 명령을 처리하는데 있어서는 뒤쳐지지만 방대한 데이터를 반복적으로 처리하는 단순 작업에서 뛰어난 가성비를 보인다.
GPU 절대 강자인 엔비디아는 GPU의 이런 강정을 살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자율주행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테슬라 아우디 메르세데스벤츠 등 자율주행 선도 기업들이 엔비디아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최근에는 ARM의 유력 인수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엔비디아는 미국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업체로서 올해 2분기 역대급 실적을 내며 지난 7월 초 시총 경쟁에서 인텔을 제쳤다. 현재는 인텔의 1.5배 수준으로 덩치를 키운 초우량 기업이다.
◆ 엔비디아, 같은 대만 출신 TSMC 대신 삼성 선택
업계에서는 엔비디아가 20년 파트너인 TSMC를 배제하고 신제품 물량 전량을 삼성전자에게 맡긴 것을 두고 이례적이란 평가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대만 출신으로 모리스 창 TSMC 창업자와 오랜 친분 관계를 쌓아왔기 때문이다.
반면 2014년 삼성과 엔비디아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특허 침해를 이유로 맞소송을 걸며 첨예하게 다투던 사이다. 2015년과 2018년에도 삼성전자는 TSMC를 제치고 엔비디아 GPU 제작을 노렸지만 결국 경험 부족과 우호적이지 못한 비즈니스 관계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 삼성이 엔비디아 일부 물량을 수주한 적은 있으나 이번과 같이 주력 라인업 제품을 전적으로 삼성전자에게 위탁한 것은 처음이다.
삼성전자로서는 미세공정 기술력을 인정받으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1위를 달리는 TSMC를 추격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도현우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2019년 기준 엔비디아 소비자용 그래픽카드 판매량이 약 5800만대"라며 "연간 판매량을 고려했을 때 삼성전자가 해당 제품 수주로 연간 20억달러 이상 추가 파운드리 매출을 기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도 애널리스트는 또한 "엔비디아 GPU 수주는 시장에서 주목하는 고성능 핵심 제품이라는 측면에서 삼성전자 파운드리 추가 고객 확보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공장인 삼성전자 평택 2라인 전경 [서울=뉴스핌] 김선엽 기자 = 2020.08.30 sunup@newspim.com |
삼성전자는 지난달 미국 IBM의 차세대 서버용 CPU 'POWER(파워) 10'의 위탁 생산도 담당하기로 했다. 퀄컴의 신형 5세대(5G) 이동통신 모뎀 칩 'X60' 생산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 절대 강자로 떠오른 테슬라의 완전자율주행(FSD) 반도체 칩을 지난해부터 위탁 생산 중이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주요 반도체 기업을 속속 고객사로 유치함에 따라 이 부회장의 '반도체 비전 2030'도 가시화됐다는 평가다.
이 부회장이 지난해 4월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1위를 달성하겠다는 '비전 2030'을 발표했을 때 업계 의구심이 상당했지만 1년 5개월이 지나면서 글로벌 반도체 시장 지각 변동이 시작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 이재용 부회장, 그룹 수장으로서 혹독한 사업재편 감행
일각에서는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이후 이재용 부회장 주도로 그룹 전체의 체질을 '외유내강'(外柔內剛)으로 변화시킨 결과라는 평가도 있다.
당시 급작스레 삼성그룹 수장에 오른 이 부회장은 이후 내부적으로는 혹독한 사업재편을 진행하는 한편 경쟁업체와의 소송전을 마무리하고 미래 파트너십을 공고히했다.
2014~2015년 삼성그룹은 방산업체와 화학 3개사를 각각 한화와 롯데에 매각, 재계를 긴장시켰고 동시에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상장시키고 하만을 인수하는 공격적 경영행보를 보였다. 또 엔비디아를 포함해 다이슨, 노키아 등과의 특허 분쟁을 마무리했다.
삼성전자 로고 [사진= 로이터 뉴스핌] |
현재 상황은 정반대다. 이 부회장이 이번에 다시 기소됨에 따라 삼성그룹은 사업재편과 대규모 투자, 인재 수혈 등에 있어 골든타임을 흘려보낼 처지다. 이른바 '뉴삼성'은 서초동 법원에 갇히게 됐다.
이창영 유안타증권 애널리스트는 "바이오로직스의 상장과 방산 및 화학 계열사 한화그룹으로의 매각, 삼성전자의 하만 인수와 삼성전자의 180조원 투자 계획 발표로 이어지는 이재용 부회장의 공격적 경영 행보는 2017년 국정농단사건 이후 멈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일례로 이 부회장은 지난 2016년 말 당선자 신분이던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IT 거물들과의 만남인 '테크 서밋'에 초청받았지만 특검 수사로 출국이 금지되면서 합류하지 못 한 바 있다.
재계 관계자는 "국정농단 의혹 사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이재용 부회장이 무려 80여 차례나 사법당국에 의해 불려 다녔다"며 "재판 일정으로 글로벌 인맥과의 미팅도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또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고 인재를 수혈하는 것은 대표이사로는 한계가 있고 오너가 직접 나서야 하는데, 이 부회장이 본인 재판에 집중해야 하므로 다른 일에 관여하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sunup@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