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춤 선구자 김백봉, '춤 도장(道場)' 찾아 떠나다
"육체를 움직이지만 사실은 영혼으로 추는 것이 춤"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한국춤의 최고 어른 취봉(翠峰) 김백봉(金白峰, 1927~2023.4.11) 선생이 11일 별세했다. 향년 97세. 아마 하늘길 오르면서도 부채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가셨을 듯하다. 그러나 부고 기사들은 김백봉 선생의 삶과 업적, 예술세계를 충분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 취봉으로 평생을 산 백봉
김백봉의 본명은 김충실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20년도 채 불리지 못했다. 10대 후반 도쿄에서 공연을 위해 지은 예명이 '백봉(白峰)'이다. 이후 김충실은 김백봉이 됐다.
그러다 김백봉은 '취봉(翠峰)'이라는 아호, 새 이름을 얻는다.
젊은 시절, 불교신자들 모임에서 만난 경봉스님이 끝자락에 앉은 김백봉에게 "아야, 니 뭐꼬! 김백봉이가 뭐야! 하얀 봉우리 위에 뭣이 있겠는가? 나무도 안 자라고, 제자들 키워도 다 없어지고, 돈도 사라지고… 하얀 봉우리엔 다 없다. 이름을 비취 봉우리, '취봉'으로 하라!"고 했다.
나중 김백봉은 이렇게 회상했다. "이름 바꾼 후 얼마 안돼 훈장을 탔어요. 제자도 늘었고... 제 아이들도 잘됐고요."
'취봉'은 비취 봉우리이지만, 취한 봉우리이기도 하다. 취봉은 그렇게 한국춤에 취해 평생을 살았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부채춤을 추는 생전의 김백봉 선생 [사진=국제춤축제연맹] 2023.04.16 digibobos@newspim.com |
흔히 김백봉을 일제강점기에 신무용의 선구자로 활동했던 최승희의 수제자 혹은 손아래 동서라는 이유로 한국 신무용의 르네상스를 이끈 인물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는 김백봉이 우리나라 예술사에 이바지한 업적에 한창 못 미치는 표현이다.
김백봉은 스승 최승희가 북한에서 체계화시킨 '조선무용'에 대항하여 대한민국의 춤인 '한국춤'을 정초(定礎)했고, <부채춤> <화관무> <장고춤>과 같은 고전미가 넘치는 춤으로 전 세계에 한국문화를 널리 알린 한국춤의 신화이자 대명사다.
◆ 아버지가 딸의 '춤길'을 열어주다
김백봉은 김병삼과 배보규의 4남3녀 중 맏딸로 평남 기양에서 태어났다. 김백봉의 춤길은 아버지가 심어주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아버지는 잠자는 6살 꼬마 충실이를 깨워 최승희(1911~69)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백봉은 최승희 춤을 보지도 못했지만 '최승희처럼 훌륭한 무용가가 되겠다'고 아버지 앞에서 결심한다. "옛날에 춤춘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무용하면 기생되는 줄 알았는데… 딸 팔아먹는다고! 그런데 아버님은 다르셨어요."
14세에 최승희 공연을 보기 위해 아버지와 진남포로 갔다. 일제는 최승희의 평양 공연을 금했다. 한국춤 추는 최승희를 보고 한국 관객들의 민족성이 살아난다는 것이었다. 최승희를 만나기 위해 아버지는 조선 사람임을 입증하는 호적까지 준비해갔다.
최승희는 백봉의 소질을 즉석에서 테스트했다. "손과 팔뒤꿈치가 똑바로 펴지는지 보고 일본에서 데려온 제자 장추화와 하리다 요코를 제 옆에 세우고 키를 재더군요. 5~7살 위인 그들과 제 키가 같아도 좋아하시더군요."
평양 명륜실업여학교 1년을 다니다 도쿄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는 충실이 태어나자마자 만든 통장을 일본 유학 가는 딸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버지는 기름제조회사에서 외국 관계자가 타는 차를 몰았다. 평양 시내에 승용차가 단 2대이던 시절이었다. 나머지 한 대는 도지사가 탔다. 아버지는 트럭을 소유했고 영어도 잘했다. 염색약 등 화학제품 제조로 돈을 많이 벌었다.
도쿄에서 백봉은 듣도 보도 못한 발레 기본을 배운 후 스승 최승희에게 검사를 받곤 했다. 정월 초하루부터 3일 동안은 스승이 계속 가르쳤다. 당시 학원생은 손가락으로 셀 만큼 몇 명 안됐다. 그나마 어려운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나갔다. 백봉은 연습은 물론 청소, 빨래, 부엌일 등 궂은 허드렛일을 하며 춤을 배웠다.
백봉은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 돌아가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키며 17세까지 춤을 배웠다. 1년 6개월 뒤인 1942년 12월 도쿄 제국극장 공연에서 〈궁녀무〉를 추어 정식 데뷔했다. 공연과 안무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최승희를 따라 중국 여행도 갔고 일본 도처에서 공연도 했다. 당시 연구생들은 스승의 집에서 먹고 자며 연구소를 다닌 덕에 최승희의 안무 작업을 숨어서 엿보며 공부했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젊은 시절의 김백봉 2023.04.16 digibobos@newspim.com |
"연습실 열쇠구멍으로 훔쳐보며 기본기를 익혔어요. 선생님(최승희)은 자기 작품을 직접 전수하진 않으셨어요. 무용을 할 수 있는 예술적 역량을 가질 수 있게 가르쳤던 겁니다."
"선생님과는 말을 별로 주고받지 못했습니다. 나이 차이도 나고 공연으로 바쁘기도 하고… 스승은 완벽한 분이셨어요. 어마어마한 예술성을 발휘하셨죠. 저도 그걸 배우려 했고요."
당시 공연 후 인력거를 타고 나오는 최승희를 보려고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인력거가 뒤집혀지는 일이 허다했다. 결국 최승희처럼 단발한 장추화를 인력거에 태워 내보내고 최승희는 뒷문으로 빠져 나가곤 했다.
◆ 최승희의 제자에서 동서가 되다
최승희의 남편 안막(본명 안필승)은 최승희 제자인 김백봉을 보자마자 동생 안제승(1996년 작고·전 경희대 교수)의 배필로 점찍었다.
안제승과 18세에 서울에서 결혼했다. '도쿄 유학생'인 남편은 영화 연출을 공부했는데, 학도병으로 한국에 가야 했다. 김백봉은 중국 공연 후 결혼을 위해 서울로 향했다. 아버지는 남편을 무척 좋아했다. "그이는 저 때문에 희생된 사나이에요. 내조를 잘 해야 했는데 제가 춤 창작하고 제자들 가르치느라 한 게 없어서… 그래도 남편이 잘 지켜주니 아이들이 제대로 컸죠."
김백봉은 발바닥이 쪼개질 정도로 춤 연습을 했지만, 남편이 '그 춤은 나빠' 하면 다시 추지 않았다. 그들은 1남2녀를 두었다. 스무살에 낳은 안병철 박사는 경희대 한방병원 침구과 과장을 역임했고, 밑으로 두 딸 병주(경희대 교수)와 병원(무용가)도 김백봉의 뒤를 이은 한국무용가이다.
"최선생은 월북시 자신의 딸 안성희를 서울에 두었죠. 다시 서울로 가려 했어요. 그런데 김일성이 '살러왔수, 댕기러 왔수' 물으니 우선은 '살러왔다'고 대답한 거죠. 저는 최선생님에게 춤을 더 배워야 하고 우리 집도 평양이라 46년 남편, 최선생 부부와 평양으로 갔어요. 3년 있었죠. 성희 낳고 15년 만인 46년에 베이징에서 낳은 최선생님 아들 병권이는 제가 키우다시피했고요. 대신 한살아래 우리 아들은 친정에서 돌봐주었어요. 최승희 선생 부부와 우리 부부는 한 집에서 살았는데, 김일성이 대동강변의 명월관을 최승희연구소와 살림집으로 개조해주었죠. 병권이가 5살 때 우리는 평양 옆 강선으로 피란을 떠났습니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1950년대의 김백봉 [사진=성두경] 2023.04.16 digibobos@newspim.com |
한 집에 살았어도 최승희가 너무 바빠 백봉과 최승희는 서로 많은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6·25전쟁은 김백봉의 집안에도 폭풍으로 다가왔다. 김백봉 부부는 부친·아들(당시 4살)과 남하했지만 모친은 내려오지 못했다. 학교에 성적표 받으러 간 김백봉의 동생들이 귀가하지 않아 그들을 기다려야 했다. 사촌 친척들도 모두 남하했는데 어머니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전쟁 당시 탄환이 날아다니는데도 38선까지 갔지만 아내와 만날 수 없었다.
◆ 전쟁이 남긴 상처와 '리버티 뉴스'
김백봉은 1.4 후퇴 후 남한에 정착하면서 많은 신상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숫자에 대한 강박증도 생겼다. 숫자 강박증은 개인의 슬픔을 넘어 분단의 현실이고 아픔이었다. 김백봉은 남하 이후에 간첩 사건과 같은 민감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경찰에 끌려갔다.
경찰은 백봉이 최승희의 사주를 받아 '위장 남하한 간첩'이라고 의심했다. 경찰서에서의 취조와 심문 내용은 매번 동일했다. 단기(檀紀)로 생년월일을 물었고, 북한에 남아 있는 형제자매, 친인척, 스승과 제자 등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쓰게 했고, 특정 해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기억하고 진술할 것을 강요했다. 이로 인해 머릿속에서 특정 이름이나 숫자를 의도적으로 지우는 강박증이 생겼다고 한다.
경찰의 이런 구속은 백봉이 1957년 미군 홍보매체 '리버티 뉴스'에 출연하며 사라지게 된다. '리버티 뉴스'는 우방 국가이자 원조 국가인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홍보하기 위해 한국춤을 촬영하였는데, 이를 위해 젊고 아름다우며 춤 실력도 출중했던 김백봉을 섭외했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2014년 공연된 '청명심수(淸明心受), 김백봉 춤의 아리랑' 포스터 2023.04.16 digibobos@newspim.com |
'리버티 뉴스' 출연 이후 김백봉은 미군의 전폭적인 지원도 받았다. 미군은 묵정동에 미군 막사를 개조해서 엄청나게 큰 무용학원을 마련해주었다. 600평 규모의 묵정동 연구소에선 200여명의 학생을 지도했는데 임성남, 조광, 송범 등과 시간을 나눠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미군의 후원이 주어지자, 백봉은 더 이상 경찰서에 끌려가는 일 없이 안정적인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1961년 한국무용협회 창단 멤버로 서울 명동 국립극장에서 진수방, 임성남, 송범, 김진걸 등과 함께 안제승작·연출의 '비련'을 공연해 한국춤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리버티 뉴스'는 김백봉의 국제적 명성도 높여주었다. 1964년 '춤의 왕국'으로 유명했던 캄보디아는 국왕이 김백봉을 초청하여 국빈 대우를 하며 1급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 한국춤의 대모
김백봉은 북한에서 어렵사리 서울로 돌아와 박기홍에게 승무를, 이동안에게 태평무와 승무를 사사했다. 1953년 서울에 김백봉무용연구소를 세웠고 재미무용가 권려성, 전황 등이 연구생이었다.
부채춤의 착상(著想)은 김백봉이 1947년 최승희의 <무당춤>을 보면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게 구상된 부채춤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4년이 되어서 서울시공관에서 열린 '김백봉 제1회 작품 발표회'를 통해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였다.
백봉은 1968년 멕시코올림픽 때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널리 알린 홍보대사였다. 그가 만들어 낸 화사한 이미지의 <부채춤>이 없었다면 한국은 '전쟁의 나라' '고아의 나라' '거지의 나라'라는 이미지에서 쉽게 탈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김백봉의 부채춤과 화관무는 국제 사회에서 '거지의 나라 코리아'의 이미지를 말끔하게 걷어냈다. 2023.04.16 digibobos@newspim.com |
"부채춤이 최고의 화제였죠. 그전까지 여러명이 추는 춤은 의상비 때문에 엄두를 못내고 혼자 추는 작품을 안무했는데, 정부에서 군무진의 의상비를 대준다니 마다할 리 없죠. 정부에서 전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예술단원을 선정해 멕시코올림픽에 파견했어요."
당시 김백봉은 '부채춤'을 비롯, 군무로 연결되는 '선의 유동' '광란의 제단', 농악, 장구춤 등으로 한국 문화를 알렸다. 어려서부터 외국 공연을 많이 나갔기에 힘든 건 없었다. 그런데 멕시코의 고도가 높아 숨쉬는 게 문제였다. "웃으면 입이 말라 못 다물 정도로 산소가 희박했어요. 무용단원 중 한 사람은 무대로 나가다 쓰러졌어요. 결국 산소호흡기를 대고 있다가 무대로 나가 춤추길 반복했죠."
이후 부채춤은 1986년 한국에서 개최된 아시아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게임, 그리고 2002년 월드컵게임 같은 정부의 국가적인 이벤트에 빠짐없이 등장했다. 또한 전국 곳곳의 운동회, 재롱잔치, 경로잔치에서 환호받는 춤이 됐다.
김백봉은 무용교육의 대계를 세우고자 자신이 학습했던 신흥무용, 발레, 현대무용, 신무용 등 온갖 춤으로부터 기본을 추출하여 한국춤의 기본을 정립하고, 이를 전국의 무용학원과 대학 무용과에 보급했다. 그가 체계화시킨 무용 기본이 곧 한국춤의 기틀이 된 것이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같은 한국춤을 두고서 전통춤, 신무용, 고전무용이라는 용어가 난무하였으나 그녀의 한국춤 기본과 <부채춤>, <화관무>, <장고춤>, <청명심수>(산조) 등 주옥같은 명작무, 그리고 <심청전>, <우리 마을 이야기>, <흥부와 놀부> 등 스토리텔링형 무용극에 의해 한국춤' 스타일이 비로소 확립될 수 있었다.
50년간 만든 창작춤만 600여편. 88년 서울올림픽에서 2천 명의 무용수가 보여준 '화관무'는 김백봉의 명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65년부터 92년까지는 경희대 무용과 교수로 한국무용 발전을 이끌었다. 그의 부채춤이나 화관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진 못했지만 대신 87년 예술원 회원이 됐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생전의 김백봉 선생 [사진=국제춤축제연맹] 2023.04.16 digibobos@newspim.com |
김백봉 춤사위의 영감은 어디서 왔을까.
"고향이 평안남도 강선군 초리면(기양)입니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과 산과 들로, 냇가로 종일 뛰어다녔고 무지개를 붙잡는다며 내달리곤 했어요. 흐르는 구름을 따라 들판을 따라 걸었고 수정같이 맑은 시냇물에 두 발을 담그곤 했어요. 고향의 아름다운 자연과 농촌생활이 제 상상력을 키워 주었고 훗날 제 예술 창작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김백봉은 춤은 결국엔 춤추는 이의 영혼이 보여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동작 한동작, 육체의 움직임은 허공에서 사라지지만 춤과 내가 하나 되어 내 마음이 가 있는 무아(無我)에 이르면 보는 이들도 무아세계를 향한 한마음이 됩니다. 육체를 움직이지만 사실은 영혼으로 추는 것이 춤입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한국 춤의 가치는 정중동입니다. 잘 추는 사람은 흘러가는 맥이 보여요. 안 되니까 동작을 자꾸 만들어 많이 추게 돼요. 우리 멜로디나 장단을 잘 알아야 하는데, 전에 (어느 무용인의) 〈가야금 산조〉를 추는데 눈에 확 들어왔어요. 그래서 물어보니 가야금을 배웠다고 해요. 우리 가락의 멋과 흥을 몸으로 표현하는 춤이 잘 추는 춤, 아니겠어? 형태가 나와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면 구질구질해집니다. 꼭 말하고 싶은 것은 인격입니다. 다 몸에서 나와요. 공부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다 춤에 드러나요. 기술이 다가 아니야. 춤에 대한 집념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김백봉은 지난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기록원의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의 무용 분야 구술채록에서 못다 이룬 소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부실하여 아직 춤 도장(道場)이 없다. 내 이름으로 된 춤 도장을 갖고 싶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세상을 떠났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에서 그의 이름을 넣은 춤 도장 하나 만들어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 위 내용 중 일부는 최해리 (사)한국춤문화자료원 이사장에 의한 김백봉 구술채록, 김백봉 인용구는 기존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것임.
◆ 김백봉 이력
1927년 음력 1월11일 4남3녀 중 맏딸로 평남 기양에서 출생
1941년 일본 도쿄 최승희무용연구소로 입소
1943년 최승희무용단원으로 동남아시아 각국 순회공연
1946년 6월 월북, 평양 최승희무용연구소 부소장 겸 상임안무가
1947년 평양 국립극장에서 제1회 김백봉 작품발표회
1953년 서울 낙원동에 김백봉무용연구소 설립
1954년 서울 시공관에서 분단후 첫 김백봉 작품발표회
1965~92년 경희대 무용과 교수, 이후 경희대 명예교수
1987년 이후 예술원회원
1995년 김백봉춤보존회 결성
2005~07년 6월 서울시립무용단장 역임
〈수상〉
서울시문화상(1953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81년) 서울올림픽 공로 대통령상(88년), 20세기를 빛낸 예술인(99년), 문화훈장 은관(2005년)
〈안무작〉
'화관무'(1947년), '춘광'(48년), '부채춤'(54년), '선의 유동'(59년), '심청'(75년), '만다라'(97년), '한양설화Ⅰ-청계'(2005년) 등 600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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